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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예전에 읽은 책들/2024년 읽은 책 2024. 12. 3. 07:50
(2024.11.26.)
P20 배내옷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사택에 살았다. 산달이 많이 남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 오전에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의 정류장 앞 점방에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려면 아직 여섯 시간도 더 남았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무세 살의 엄마는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다. 반짇고리 상자를 뒤져보니 작은 배내옷 하나를 만들 만한 흰 천이 있었다.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모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 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P35 빛이 있는 쪽
이 도시의 유태인 게토에서 여섯 살에 죽은 친형의 혼과 함께 평생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실화를 읽었다. 분명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인데, 그렇게 일축하기 어려운 진지한 어조로 씌어진 글이었다. 형상도 감촉도 없이 한 아이의 목소리가 시시로 그에게 찾아왔다.
P39 초
아무것도 소스라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촛농은 희고 뜨겁다. 흰 심지의 불꽃에 자신의 몸을 서서히 밀어넣으며 초들이 낮아진다.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P59 진눈깨비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을,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P88 흰 돌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P106 갈대숲
갈대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늪에 야생오리 한 쌍이 살고 있다. 살얼음의 표면과 아직 얼지 않은 회청색 수면이 만나는 늪 가운데서 나란히 목을 수그려 물을 마시고 있다.
그것들에게서 돌아서기 전에 그녀는 묻는다.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라고 떨면서 스스로에게 답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어떤 대답도 유보한 채 그녀는 걷는다. 살풍경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절반쯤 얼어 있는 그 늪가를 벗어 난다.
P109 넋
넋이 존재한다면, 그 보이지 않는 움직임은 바로 그 나비를 닮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해왔다.
P123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물큰하게 방금 보도를 덮은 새벽 눈 위로 내 검은 구두 자국들이 찍히고 있었다.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떠날 때 아직 여름이었던 서울이 얼어 있었다.
뒤돌아보자 구두 자국들이 다시 눈에 덮이고 있었다.
희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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