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면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온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 때 오늘과 다른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
P094 다시 찾아온 기회. 좌측 빈 공간을 보고 달리던 내게 반대편에서 크로스가 올라왔다. 조금 길었지만 상대 수비수보다 반걸음 먼저 달려들었고 문전으로 침투하던 윌리암에게 간신히 센터링을 올렸다. 공은 운 좋게도 윌리암의 머리로 향했고 윌리암은 침착하게 골로 연결했다. 선수들이 서로 얼싸안고 축하하는 동안 나는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조선번개가 내가 있는 골라인 근처로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평소 골보다 어시스트가 더 가치 있다고 가르쳤던 나였다. 번쩍 안아서 공중에서 한 바퀴 돌리고는 조선번개를 내려주는 순간 아들의 신발코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오래 신었을까? 낡은 찍찍이 운동화는 앞쪽이 찢어져 구멍이 나 있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경기 결과보다 조선번개의 구멍 난 신발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자라는 아이에게 결핍은 좋은 스승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럴듯한 문장 뒤에 숨은 경제적 결핍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빠, 공 찰 때 발가락이 아파." "축구공은 발가락으로 차는 게 아니라 발등으로 차는 거야" 정호의 구멍 난 신발을 벗겨서 주물러주는데 울컥했다.
P144 숙제도 놀이처럼 뛰어다니며 즐기고, 수업 시간에도 웃고 떠들며 배운다. 공부하는 양이나 학습 능력은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못할지 모르지만 나는 부에나비스타 학교가 우리나라 학교보다 바람직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누군가는 겨우 몇 달 살아보고 섣불리 판단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집에 초등학생 자녀가 있다면 한번 물어보시라! 학교 가는 것이 재미있고 즐거운지를. "오늘 날시도 좋은데 학교 가지 말고 아빠랑 놀래?" 그러면 소니아와 호세는 대꾸도 않고 친구들 손을 잡고 학교로 뛰어간다.
P155 선택은 하늘에 맡겼지만 표정만큼은 진지했다. 그러고는 빨간색 펜으로 후보자 얼굴에 엑스(x)표시를 했다. 장난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선 엑스 표시가 선택한다는 뜻이다. 우리와는 정반대인 셈이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길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를 뽑는 투표가 귀찮다고 생각하지 말자. 뽑아봐야 거기서 거기라고 포기하지도 말자. 즐기자! 선거는 축제니까.
P166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군.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자네에게 무슨 질문을 할 것이 가야." "말해봐. 월요일과 화요일은 뭐가 다르지?" "맞아, 자네가 읽고 있는 책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지."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거든. 그럼 1년으로 기간을 늘려볼까? 지난해와 올해는 뭐가 다르지? 자넨 마치 호세가 된 것처럼 이곳에 온 가족을 데리고 오지 않았나? 여기가 책에 등장하는 유토피아 '마콘도Macondo'라도 되는 줄 알고 말이야. 책을 읽어봤으면 알겠지만 마콘도도 결국 썩고 병들어서 멸망하고 말아. 대체 지난해와 올해는 뭐가 다르지?"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처럼 살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며 술잔을 비웠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도 나보다 처지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나보다 경제적 여유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그들에게 없는 건 용기와 실행력이었다. "자넨 아직도 내 질문이 뭔지 모르고 있군. 그럼 그렇게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 것이 자네의 욕심이 아니라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건가? 천만에! 자넨 한 번도 가족을 생각해서 결정한 적은 없었네. 그저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결정부터 하고는 가족들에게도 좋은 일이라며 합리화한 것뿐이지. 자, 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 어제나 오늘이나, 지난해나 올해나 자넨 달라진 게 뭔가?" "자넨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만 궁금해하는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대체 지난해와 올해는 뭐가 다른가? 그리고 올해와 내년은 뭐가 다른가? 자넨 왜 이곳에 온 건가?"
P184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한다. 그 선택으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 가족도 또 한 번의 선택을 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후에 어떤 삶을 살았으냐가 중요하니까.
P196 1년 365일 초여름 날씨인 부에나비스타. 계절이 바뀌지 않으면 시간도 느리게 흘러간다. 어떤 때는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니 모든 게 빠르게 돌아간다.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늘 쫓기는 기분이 든다. 그냥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여행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을까? 별로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이는데,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살기란 이상에 가까운 일이다. 한 손엔 '이상'을 다른 한 손에 '현실'을 들고, 머리엔 '가족'을 얹은 채 외줄 타기를 하는 이 시대의 가장들! 나 또한 그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도 바쁘고 너도 바쁜데 왜 바쁜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바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는데, 바쁨은 성공으로 느림은 실패로 그냥 짝지어버린다. 나는 느리게 사는 게 행복한데 세상은 게으름이라고 한다.
P206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원하는 재화를 사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거나, 재미있는 일을 찾기도 한다. 그런데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데 그 비결은 바로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다. 휴대전화를 바꾸면 3개월 정도는 즐거울 것이다. 차를 바꾸면 6개월 정도는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꾸면 평생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
P217 내가 취득한 자격증은 모두 15개. 자동차 정비사, 이발사, 용접기능사, 레크리에이션2급, 이벤트플래너, 생활체육지도자 3급(수영), 응급처치사, 수상인명 구조원, 중등체육실기교사, 해기사, 동력수상레저기구조정면허1급, 스킨스쿠버 오픈워터, 스포츠 마사지 2급, 택시 운전기사 자격증 그리고 1종 대형 운전면허.
P236 "조국? 난 그런 거 몰라. 왜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갔는지도 몰라. 그냥 먹기 위해 싸웠고 살기 위해 싸웠어. 명예? 내 다리를 빼앗긴 대가가 이 양철 조각이라고? 웃기시네." 그는 훈장을 땅바닥에 팽개치더니 목발을 짚고 나가버렸어. 체격이 건장한 흑인이었어. 하지만 난 확인할 수 없었어. 그가 막시모였는지 아닌지. 두려웠거든. 많은 흑인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왔지만 그들의 처우는 나아지지 않았어. 부상을 입고 돌아온 사람들은 일자리조차 구하기 힘들었지. 공장에서 누가 불구자를 쓰겠는가? 대대를 이끈 사령관은 장관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말이야
P284 무대에 서면 늘 가슴이 뛰었다. 무대에 서면 나는 세상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연극은 늘 삶을 보여주며 비틀고 꼬집고 울리고 웃겼다. 그러나 막이 내리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허무할 수 없었다. 공연 후에 흔히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허무함. 연극은 끊임없이 생활을 닮으려고 하는데 정작 생활은 왜 연극처럼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 것일까? 연극은 늘 다른 연극들과 다르게 보이려고 노력하는데 생활은 왜 늘 남들과 다르면 불안해하며 똑같아지려고 할까? 생활도 연극처럼 남들과 다르게 해 볼 수는 없을까? 내가 사는 마을이 무대가 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배우가 될 수는 없을까? 그들과 가슴 뛰는 연극 같은 생활을 할 수는 없을까? 말도 안 되고 현실성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바로 그 엉뚱한 생각이 콜롬비아행의 시작이었다.